[코리아드림티비] 미리내 성지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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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지
미리내 성지의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시궁산時宮山 515m, 神仙峰으로도 전해짐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 우리말 ‘미리내’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옛 지명이다.
미리내는  초기 비밀교회인 미리내, 한덕골, 골배마실, 굴암, 검은정이 중 한 곳이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에 경상도 상주 ‘잣골’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체포 되어 순교한 신태보 베드로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일찍이 일가를 이끌고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살았던 곳이 용인 교우촌 이었다. 여섯 살 소년 김대건이 1827년에 할아버지 김택현, 아버지 김제준을 따라 충청도 당진 솔뫼에서 박해를 피해 들어온 곳이 한덕골- 묵리 한덕동 광파리골- 교우촌이다.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 최영겸 베드로 일가가 1837년 충청도에서 박해를 피해와 정착해 살던 곳도 미리내 언덕너머 ‘한덕골’로서, 기해박해로 최양업의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하자, 최양업의 막내 어린동생 최신정이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때까지 성장했던 곳이다.

 1839년경 풍양 조씨 일가도 박해를 피해 미리내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전해진다.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옮겨온 '이민식李敏植, 빈첸시오', 1829~1921 등의 집안도 조부 때에 이미 이곳 미리내로 이주해 와 정착하였다.  1846년 10월 30일 순교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미리내는 선교사들이 피신하여 우리말과 풍습을 배우고 익히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1863년 가을에는 '칼래N. 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가 이곳에 머물면서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작성한 사실이 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미리내 성지안성시 양성면 미산리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묘소와,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소 유지遺址,  '16위 무명순교자의 묘역'이 있는 거룩한 성지이다.
 김대건 신부에게 부제품과 사제품을 준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高주교, 미리내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여 1929년까지 33년간 본당을 지킨 초대주임 '강도영姜道永 -마르코', 세 번째 방인사제 중 한 분-신부와, 간도지방 최초의 방인 사제 였던 미리내 본당 3대주임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의 묘소가 함께하고 있다.
묘역 왼쪽 윗 편으로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의 묘소,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이곳에 안장 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6년 9월 16일 만25세의 나이로 극히 짧은 사목 활동을 마치고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한 점 흠결 없이 순교하였다.

 17세의 미리내 청년 이민식 빈첸시오는 파수군졸의 눈을 피해 김대건 신부님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1846년 10월26일, 몇 몇 교우들과 시신을 한강 새남터 백사장에서 빼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가슴에 안고 등에 지고, 험한 산길로 만 1백 50여리 길을 밤에만 걸어서 닷새째 되는 날인 10월 30일 자신의 고향 선산이 있는 미리내에 도착하여 신부님을 무사히 안장 시킬 수 있었다.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선종하자, ‘거룩한 순교자의 곁에 있고 싶다.’는 주교의 유언을 따른 교회의 결정으로 그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묘소의 옆자리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치명한 1864년 5월17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 1984년 성인위에 오름와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 어머니도 김대건 신부의 묘소 옆에 나란히 모셨다.  이민식 빈첸시오도 92세에 세상을 뜨니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묘역 곁에 묻히게 되었다.

1883년에 '순교자 79위 시복 조사'를 담당하고 있던 서울교구의 뮈텔Mutel, 閔德孝신부가 이곳을 방문하고 미리내 공소를 설립하였다.  1896년 5월, 강도영姜道永 신부의 부임으로 미리내에 본당이 설정 됐을 때에, 이곳에는 182명의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다.
 1906년  '미리내 요셉성당' 축성 때에는 교우 수가 1,600명을 넘었다.
1922년에는 본당관할 12개 공소의 공소 신자가 1,453명에 이르렀다.
원삼면의 고추골, 용바위, 모래실. 내사면의 은이, 골배마실, 수여면의 별미. 미동면의 먹뱅이, 한터울, 안터, 사리틔, 쇠재. 남사면의 사미로니 등 12곳 공소들로서, 미리내 인근 30리 이내의 이들 교우촌들이, 옛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며 꿋꿋이 믿음살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미리내에서 오두재-애덕고개, 해실이-망덕고개, 어은이고개-신덕고개-를 넘어가면 은이공소-미리내 성지에서 9Km-에 이른다. 은이공소와 골배마실은 작은 산을 사이에 두고 넘나들던 1.5Km 구간이다.
Date 20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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